(KBS노동조합 논평)
제작자율성은 전가의 보도가 아니다. 더구나 무소불위의 권력도 아니다.
PD들의 연명 성명이 잇따르고 있다. PD들은 PD협회 성명서를 통해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다큐 인사이트>는 「세월호 10주기 다큐」를 준비했으며, 지난해 본부 차원에서 4월 18일 방송이 결정됐다. 현재 40%의 촬영이 완료됐다. 새로 부임한 제작본부장은 「세월호 10주기 다큐」를 다른 재난과 엮은 PTSD 시리즈(외상후스트레스증후군 시리즈)로 제작해 총선 이후인 6월 이후에 방송하라고 지시했다. 제작진은 총선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본부장의 주장을 수용할 수 없으며 세월호 다큐는 4월에 나가야 한다는 입장이다.
PD들의 주장에 수긍 가는 대목이 있다. 제작진 입장에서는 프로그램 제작을 위한 취재 중 방향이나 세부사항에 대해 수정을 하면 어려움을 겪게 된다. 취재와 출연자 섭외 등에 차질이 있을 수 있는 만큼 프로그램 최초 기획 의도와 방향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나 제작진이 프로그램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새 본부장이 부임했다. 신임 본부장은 해당 프로그램이 변화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럴 경우 어떻게 해야 하나? 전임 본부장이 내린 결정을 무조건 고수해야 하나? 전임 본부장이 내린 결정을 고수하는 것이 제작진을 비롯해 PD들이 주장하는 제작자율성인가? 프로그램에 대한 신임 본부장의 의견은 완전히 무시돼야 하나? 신임 본부장의 의견이 전혀 반영되지 않은 채 프로그램을 방송되는 것이 제작진과 PD들이 말하는 제작자율성인가?
제작자율성에서 말하는 외부의 압력은 무엇인가? 제작진을 제외한 그 어느 누구도 의견을 제시하면 안된다는 것인가? 제작 총책임자인 본부장이 프로그램 제작에 대해 지휘하는 것을 외부의 압력이라고 주장하면 제작본부에 본부장, 국장, 부장은 왜 필요한가? 본부장과 국장, 국장은 제작진이 제작한 프로그램이 거쳐가는 정거장에 불가한가?
신임 본부장은 프로그램에 대해 제작진과 다른 의견을 제시했다. 본부장의 판단은 세월호와 함께 천안함 등 다양한 재난 사례를 포함해 PTSD 시리즈로 제작하자는 것이다. 신임 본부장의 결정처럼 여러 재난을 포함한 PTSD 시리즈로 제작하는 것이라면 ‘4월 18일 방송’을 고집할 필요가 없다. 4월 18일에 맞춰 방송해야 한다는 제작진의 의사도 고려해야겠지만, 프로그램 내용이 달라진다면 4월 18일을 고집할 이유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 제작진과 PD협회는 자신들의 주장을 신성불가침한 것으로 선언하고, ‘세월호 10주년’에 맞춰 ‘내용 수정’도 ‘방송일 조정’도 불가하다는 입장이다. 자신들의 주장만 옳고 다른 구성원의 주장, 더구나 지휘 권한이 있는 제작 본부장의 의견을 적대시하는 입장에서 한치도 물러서지 않고 있다. 이런 게 제작진과 PD들이 말하는 제작자율성인가?
세월호 프로그램이 정치적으로 민감하다는 본부장의 판단이 잘못됐다고 제작진이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제작진과 PD협회가 인정하든 아니든 세월호 이슈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이다. 어떠한 정치적 이슈도 포함되지 않았다고 제작진이 주장해도, 우리 사회의 많은 구성원들이 세월호 이슈를 정치적 이슈로 받아들이고 있다. 정치적으로 민감할 수 있는 사안에 대해 간부들이 의견을 개진하고 방향을 수정하는 것이 잘못된 것인가? 온전히 제작진에게만 맡겨두는 것이 옳은 것인가? 프로그램의 방향이나 세부 내용을 확인한 뒤 제작진에게 의견을 제시하는 본부장은 무조건 비판받아야 하나?
KBS는 지난 6년간 ‘제작자율성’을 전가의 보도로 앞세운 민노총 노조에 의해 지난 6년간 철저히 무너졌다. 주진우의 라이브, 최경영의 최강시사, 홍사훈의 경제쇼가 KBS에 남긴 폐혜를 KBS 구성원들은 똑똑히 알고 있다. 라디오만의 문제가 아니다. 뉴스와 시사프로그램도 마찬가지다. KBS를 향해 쏟아졌던 비난과 비판을 그새 잊었나? 제작자율성을 앞세운 횡포는 이제 KBS에서 사라져야 한다. 제작자율성은 더 이상 전가의 보도가 아니며, 무소불위의 권력도 아니다.
KBS노동조합은 세월호 사고로 피해를 당한 모든 분들게 심심한 위로를 전한다.
제작자율성이라는 미명 아래에서 부당한 압력을 가하는 세력에게 KBS가 다시는 휘둘리지 말아야 한다는 절박함에서 이 글을 게시한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2024년 2월22일